2008/2/9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삶
장기려 박사의 아름다운 삶
성산 장기려 선생은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생을 마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진정한 의미의 봉사의 삶을 살다 간 '참의사'였다.
돈과 사욕을 멀리한 채, 말년에는 병원(고신 의료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가진 것 없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또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켜 45년을 홀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서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돌려보내기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서울 의대의 전신인 경성 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내 최초로 초기 간암 환자를 간 절제술로 완치시킨 장기려는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보험 제도가 없던 시절에는 부산에서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국내 의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드러내지 않고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장기려 박사의 파란만장한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한 귀감이 될 만하다. 본받을 만한 어른이 없는 이 시대에 진정한 의인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장기려 박사의 삶 1
거지에 수표를 주며
어느 날, 장기려가 외출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는데, 한 나이 많은 거지가 그의 옷을 붙잡았다. 기려는 그의 측은한 얼굴을 보며, 여기저기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 돈을 찾았지만 비어 있었다. "아차, 미처 돈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거지 노인은 아주 실망하여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몇 걸음 옮기던 기려는 다시 돌아서서 "노인, 거기 잠깐만 계십시오." 하고 불러 세웠다. 노인이 희망이 넘치는 얼굴로 다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기려는 양복 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찾아 낸 것이었다.막상 기려가 내민 수표를 보자 거지 노인의 얼굴이 다시 실망으로 그늘졌다. "이 종이 나부랭이가 돈이란 말이요?" 다시 돌아서려는 거지 노인을 기려는 다시 붙잡았다. "이것은 수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행에 가지고 가면 돈으로 바꿔 줄 겁니다." 수표를 처음 본 노인은 놀라움으로 눈이 둥그래졌다. 기려는 마치 수표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듯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 며칠 후, 벙원 원장실로 전화가 왔다. "여기 은행입니다. 혹시 수표를 잃어버리신 일이 없으신지요?" "아닙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 " 웬 거지 노인이 박사님의 사인이 된 수표를 가지고 왔는데요?", '아! 그것 말이군.' 기려는 그제서야 며칠 전 거지에게 준 수표가 생각이 났다. "그 수표는 내가 준 것이니 그리 알고 돈을 지불해 주시오." 기려는 거지 노인이 그가 일러 준 대로 은행에 찾아간 것이 고마웠다. "박사님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런 수표까지 거지에게 주시다니요?" 은행원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거지에게 준 수표 한 장. 그 수표가 얼마짜리인지는 수표를 준 기려와 그것을 받은 거지, 그리고 돈을 지불한 은행원, 그리고 하느님만이 아는 일이었다.
장기려 박사의 삶 2
책보다는 돈이 낫지 않겠나?
병원 경비원이 순시를 하다가 원장 사택 쪽으로 숨어드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얼마 전 한복을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들은 경비원은 이번에도 도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경비원은 이 기회에 자기 손으로 꼭 도둑을 잡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장 장기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하였다.
경비원은 오랫동안 골수염으로 고생하던 사람이었는데 3년째 누워 지내던 어느 날, 외출했던 친척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병을 고칠 방법이 생겼다고 흥분했다. "장 박사가 사택에서 병원으로 가는 길에 자갈밭이 있는데 거기 누워 있다가 그분 눈에 띄어 돈 없어도 병 고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군" 경비원은 친척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마침 출근하는 기려의 눈에 띄어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다. 퇴원을 하던 날, 그는 부끄러운 나머지 장기려를 찾아가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마시오, 오죽하면 자갈밭에서 나를 만나려고 했겠소." 기려는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었다. "당장 힘든 일은 피하는 것이 좋겠소. 혹시 병원 경비원으로 일해 볼 마음이 있으면 여기에 있어도 괜찮으니 생각해 보시오." 그래서 경비원이 된 그는,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던 터에 마침 사택으로 숨어드는 도둑을 발견한 것이었다. 경비원은 구두를 벗어 놓고 발걸음을 죽인 채, 서재의 창문을 살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원장이 이미 도둑을 잡아놓고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도둑은 서재 앞에다 가져온 보자기를 펴놓고 책을 싸려고 한 모양이었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대신 그 책값을 쳐 줄 테니 책을 두고 가시오. 무거운 책보다야 돈이 더 낫지 않겠소?", "원장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도둑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 이 돈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짓 말고 바르게 살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원장님." 도둑은 돈을 받아들고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다. 경비원은 사라지는 도둑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다시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나오면서 경비원은 구두를 벗어두고 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은혜를 갚을 기회는 놓쳤지만, 커다란 감동 하나가 가슴 가득 차 올랐다.
장기려 박사의 삶 3
병은 약이 아닌 사랑의 손길로
거제 보건원의 정희섭 원장은 기려가 월남해 왔을 때 부산 제3육군 병원의 원장으로 기려를 받아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기려는 2주일에 이틀씩만 거제도에서 환자를 보기로 했다. 그가 오는 날은 병원이 장날처럼 붐볐다. 외딴 섬마을에서 오는 환자들은 바람이 불어서 배를 탈 수 없을가 걱정되어, 미리 병원 가까운 여관에 들기도 했다. 어느 할머니는 손자가 수술을 받고 퇴원하게 되는 날, 손수건에 달걀 3개를 싸 와서 기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선생님, 우리 삼대 독자를 살려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기려는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서 기도로 키워 주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 손자의 병은 제가 낫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금 도와 주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이 수술하여 우리 손자를 안살렸습니까?" 기려는 웃으며 설명했다. "할머니, 우리 몸에는 자기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이 있답니다. 그 힘이 없다면 의사는 아주 작은 수술도 못한답니다. 할머니는 칼을 쓰시다가 혹 손을 벤 일이 있었지요?", "암, 있고 말고요." 할머니는 유명한 박사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물어 오는 것이 고마워서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 어디 약을 바르고 할 틈이 있습니까? 피가 멈추게 꼭 사매 두고 일을 하다 보면 언제 나았는지 모르게 말짱해졌지." 할머니는 손가락의 상처자국을 찾아 내려고 앙상한 손을 펴서 들여다 보았다. "알 듯도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네요. 우리 손자를 선생님이 분명히 살려 내시고도 그 공이 아니라고만 하시니....." 할머니가 두고 간 달걀 3개의 마음은 기려가 무의촌을 찾을 때마다 떠올랐다. "환자는 의사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고마워한다네. 그 고마워하는 마음이 병을 빨리 낫게 하는 데 큰 몫을 하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네." 이것은 기려가 무의촌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을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말이었다.
장기려 박사의 삶 4
40년 만에 편지로 만난 부부
장기려는 이처럼 오늘까지 사랑의 의사로 살아 온 사람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빛은 그치지 않는다. 40년 넘게 남쪽에서 살아오는 동안 그의 홀아비(?) 신세를 면케 해 줄 몇 차례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기려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림을 어찌 저버리겠습니까?"하며 완곡하게 거절하곤 하였다. 그렇게 청혼을 거절하고 돌아온 날 밤에는 아내가 꿈 속에서 웃었다. 그런 그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은 것인지 장기려는 1988년 북한에 있는 그의 가족들이 모두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 전쟁 때 열 일곱 어린 나이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간 큰아들 택용은 약학 박사가 되어 국제 회의에 가끔씩 참석한다는 소식이었고, 큰 딸 신용은 식품 공학사, 성용은 핵물리학 박사, 인용은 이론 물리학 박사, 진용은 교사로 일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미국에 살고 있는 조카딸 장혜원이 여기저기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의 팔십이 넘은 아내가 아직도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기려는 이 소식에 접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제껏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 누군가가 북쪽의 가족들을 기려 대신 보살펴 주리라는 소망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그는 한없이 감격하였던 것이다. 그의 조카딸은 가까스로 북에 있는 가족들의 편지도 가져다 주었다. 그의 큰 딸 신용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었다.
<언니가 보내 준 두 장의 사진을 보고 저희들은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사진과 가용 오빠의 사진을 만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언니, 더 슬픈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못 알아보시는 것이었어요. "가용이구나. 너희 아버지 모습이 많이 들어 있어." 하시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가용 오빠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던지 아버지의 사진을 보시곤 가용 오빠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또 한 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어요. 저희들이 이 사진이 가용 오빠고, 처음 보는 사진이 아버지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어요. 언니, 사실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젊어 꼬부랑 할머니가 된 우리 어머니가 못 알아보실 만도 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시더니 "우리가 사진으로 이렇게 만나다니요?" 그러시곤 한참을 우셨어요>
기려는 이 편지 대목에서 아내가 울었듯이 한참 울었다. 아내보다 젊어 보인 것이 너무 미안했다. 장기려 가족의 헤어짐은 단순히 일가족의 이산을 넘어 민족 분단의 상처가 우리 민족 전체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아로새겼는가를 생각케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한 것은 그가 북의 아내에게 띄운 편지다.
<40년을>
성산 장기려 선생은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생을 마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진정한 의미의 봉사의 삶을 살다 간 '참의사'였다.
돈과 사욕을 멀리한 채, 말년에는 병원(고신 의료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가진 것 없이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는 또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켜 45년을 홀로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서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돌려보내기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서울 의대의 전신인 경성 의전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국내 최초로 초기 간암 환자를 간 절제술로 완치시킨 장기려는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보험 제도가 없던 시절에는 부산에서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국내 의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드러내지 않고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장기려 박사의 파란만장한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한 귀감이 될 만하다. 본받을 만한 어른이 없는 이 시대에 진정한 의인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다.
장기려 박사의 삶 1
거지에 수표를 주며
어느 날, 장기려가 외출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는데, 한 나이 많은 거지가 그의 옷을 붙잡았다. 기려는 그의 측은한 얼굴을 보며, 여기저기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 돈을 찾았지만 비어 있었다. "아차, 미처 돈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거지 노인은 아주 실망하여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몇 걸음 옮기던 기려는 다시 돌아서서 "노인, 거기 잠깐만 계십시오." 하고 불러 세웠다. 노인이 희망이 넘치는 얼굴로 다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기려는 양복 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찾아 낸 것이었다.막상 기려가 내민 수표를 보자 거지 노인의 얼굴이 다시 실망으로 그늘졌다. "이 종이 나부랭이가 돈이란 말이요?" 다시 돌아서려는 거지 노인을 기려는 다시 붙잡았다. "이것은 수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행에 가지고 가면 돈으로 바꿔 줄 겁니다." 수표를 처음 본 노인은 놀라움으로 눈이 둥그래졌다. 기려는 마치 수표라도 있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듯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 며칠 후, 벙원 원장실로 전화가 왔다. "여기 은행입니다. 혹시 수표를 잃어버리신 일이 없으신지요?" "아닙니다. 그런 일이 없습니다." " 웬 거지 노인이 박사님의 사인이 된 수표를 가지고 왔는데요?", '아! 그것 말이군.' 기려는 그제서야 며칠 전 거지에게 준 수표가 생각이 났다. "그 수표는 내가 준 것이니 그리 알고 돈을 지불해 주시오." 기려는 거지 노인이 그가 일러 준 대로 은행에 찾아간 것이 고마웠다. "박사님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런 수표까지 거지에게 주시다니요?" 은행원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거지에게 준 수표 한 장. 그 수표가 얼마짜리인지는 수표를 준 기려와 그것을 받은 거지, 그리고 돈을 지불한 은행원, 그리고 하느님만이 아는 일이었다.
장기려 박사의 삶 2
책보다는 돈이 낫지 않겠나?
병원 경비원이 순시를 하다가 원장 사택 쪽으로 숨어드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얼마 전 한복을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들은 경비원은 이번에도 도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경비원은 이 기회에 자기 손으로 꼭 도둑을 잡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장 장기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하였다.
경비원은 오랫동안 골수염으로 고생하던 사람이었는데 3년째 누워 지내던 어느 날, 외출했던 친척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병을 고칠 방법이 생겼다고 흥분했다. "장 박사가 사택에서 병원으로 가는 길에 자갈밭이 있는데 거기 누워 있다가 그분 눈에 띄어 돈 없어도 병 고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군" 경비원은 친척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마침 출근하는 기려의 눈에 띄어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다. 퇴원을 하던 날, 그는 부끄러운 나머지 장기려를 찾아가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마시오, 오죽하면 자갈밭에서 나를 만나려고 했겠소." 기려는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 주었다. "당장 힘든 일은 피하는 것이 좋겠소. 혹시 병원 경비원으로 일해 볼 마음이 있으면 여기에 있어도 괜찮으니 생각해 보시오." 그래서 경비원이 된 그는,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던 터에 마침 사택으로 숨어드는 도둑을 발견한 것이었다. 경비원은 구두를 벗어 놓고 발걸음을 죽인 채, 서재의 창문을 살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원장이 이미 도둑을 잡아놓고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도둑은 서재 앞에다 가져온 보자기를 펴놓고 책을 싸려고 한 모양이었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대신 그 책값을 쳐 줄 테니 책을 두고 가시오. 무거운 책보다야 돈이 더 낫지 않겠소?", "원장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도둑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 이 돈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짓 말고 바르게 살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원장님." 도둑은 돈을 받아들고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다. 경비원은 사라지는 도둑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다시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나오면서 경비원은 구두를 벗어두고 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은혜를 갚을 기회는 놓쳤지만, 커다란 감동 하나가 가슴 가득 차 올랐다.
장기려 박사의 삶 3
병은 약이 아닌 사랑의 손길로
거제 보건원의 정희섭 원장은 기려가 월남해 왔을 때 부산 제3육군 병원의 원장으로 기려를 받아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기려는 2주일에 이틀씩만 거제도에서 환자를 보기로 했다. 그가 오는 날은 병원이 장날처럼 붐볐다. 외딴 섬마을에서 오는 환자들은 바람이 불어서 배를 탈 수 없을가 걱정되어, 미리 병원 가까운 여관에 들기도 했다. 어느 할머니는 손자가 수술을 받고 퇴원하게 되는 날, 손수건에 달걀 3개를 싸 와서 기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선생님, 우리 삼대 독자를 살려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기려는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서 기도로 키워 주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 손자의 병은 제가 낫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금 도와 주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이 수술하여 우리 손자를 안살렸습니까?" 기려는 웃으며 설명했다. "할머니, 우리 몸에는 자기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이 있답니다. 그 힘이 없다면 의사는 아주 작은 수술도 못한답니다. 할머니는 칼을 쓰시다가 혹 손을 벤 일이 있었지요?", "암, 있고 말고요." 할머니는 유명한 박사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물어 오는 것이 고마워서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 어디 약을 바르고 할 틈이 있습니까? 피가 멈추게 꼭 사매 두고 일을 하다 보면 언제 나았는지 모르게 말짱해졌지." 할머니는 손가락의 상처자국을 찾아 내려고 앙상한 손을 펴서 들여다 보았다. "알 듯도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네요. 우리 손자를 선생님이 분명히 살려 내시고도 그 공이 아니라고만 하시니....." 할머니가 두고 간 달걀 3개의 마음은 기려가 무의촌을 찾을 때마다 떠올랐다. "환자는 의사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고마워한다네. 그 고마워하는 마음이 병을 빨리 낫게 하는 데 큰 몫을 하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네." 이것은 기려가 무의촌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을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심어 주는 말이었다.
장기려 박사의 삶 4
40년 만에 편지로 만난 부부
장기려는 이처럼 오늘까지 사랑의 의사로 살아 온 사람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빛은 그치지 않는다. 40년 넘게 남쪽에서 살아오는 동안 그의 홀아비(?) 신세를 면케 해 줄 몇 차례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기려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림을 어찌 저버리겠습니까?"하며 완곡하게 거절하곤 하였다. 그렇게 청혼을 거절하고 돌아온 날 밤에는 아내가 꿈 속에서 웃었다. 그런 그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은 것인지 장기려는 1988년 북한에 있는 그의 가족들이 모두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국 전쟁 때 열 일곱 어린 나이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간 큰아들 택용은 약학 박사가 되어 국제 회의에 가끔씩 참석한다는 소식이었고, 큰 딸 신용은 식품 공학사, 성용은 핵물리학 박사, 인용은 이론 물리학 박사, 진용은 교사로 일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미국에 살고 있는 조카딸 장혜원이 여기저기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의 팔십이 넘은 아내가 아직도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기려는 이 소식에 접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제껏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 누군가가 북쪽의 가족들을 기려 대신 보살펴 주리라는 소망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그는 한없이 감격하였던 것이다. 그의 조카딸은 가까스로 북에 있는 가족들의 편지도 가져다 주었다. 그의 큰 딸 신용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었다.
<언니가 보내 준 두 장의 사진을 보고 저희들은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사진과 가용 오빠의 사진을 만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언니, 더 슬픈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못 알아보시는 것이었어요. "가용이구나. 너희 아버지 모습이 많이 들어 있어." 하시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가용 오빠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던지 아버지의 사진을 보시곤 가용 오빠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또 한 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어요. 저희들이 이 사진이 가용 오빠고, 처음 보는 사진이 아버지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어요. 언니, 사실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젊어 꼬부랑 할머니가 된 우리 어머니가 못 알아보실 만도 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시더니 "우리가 사진으로 이렇게 만나다니요?" 그러시곤 한참을 우셨어요>
기려는 이 편지 대목에서 아내가 울었듯이 한참 울었다. 아내보다 젊어 보인 것이 너무 미안했다. 장기려 가족의 헤어짐은 단순히 일가족의 이산을 넘어 민족 분단의 상처가 우리 민족 전체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아로새겼는가를 생각케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한 것은 그가 북의 아내에게 띄운 편지다.
<40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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